공존(共存)과 상생(相生)의 미학(美學)
- 박종만 교수-
70년대 청바지와 통기타로 대변되는 젊은이의 문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가수 중 한 사람이 양희은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부른 노래 중에 김민기씨의 곡인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의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먹을 것을 가지고 붕어 두 마리가 싸우다가 한 마리가 죽어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았지만 죽은 고기가 썩기 시작하면서 결국 남은 붕어도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군사 정권에 일침을 가하는 저항 메시지로서 욕심과 이기심에 대한 경고적 교훈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이때에 ‘내가 했다’는 생각, ‘내 교회’라는 소아병적(小兒病的)인 발상을 깨뜨렸으면 좋겠습니다. ‘내 곡식, 내 곡간, 내 영혼’이라고 했던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주인공에 대해서 하나님은 지혜롭다거나, 똑똑하다거나, 잘했다고 칭찬하시지 않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음을 깊이 음미하고 되새기는 혜안(慧眼)이 필요합니다. 잠시 긴장을 풀고 바다 건너 미국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과거 빌 게이츠가 시애틀 호숫가에 4000만 달러를 들여 맘모스 저택을 지었을 때도, 도널드 트럼프가 새 연인을 맞아 무려 60억 원을 들이는 초호화판 결혼식을 거행했을 때도 미국의 서민들은 부자들이 세우는 새로운 신기록에 감탄할 뿐 빈정대지 않았습니다. 분명 우리의 정서와는 사뭇 거리가 있는 모습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억만장자들의 이질적인 놀음에도 그들이 분노하지 않고 함께 축하하고 즐기는 이 독특한 문화는 바로 부자들의 소유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평생 모은 모든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 떠난 강철왕 카네기에서부터 록펠러가 남긴 유산으로 장학생 1만 명을 공부시켜 노벨상 수상자를 무려 60명이나 배출한 것이나 AIDS, 말라리아, 결핵 등의 질병퇴치를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기부한 빌 게이츠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역시 돈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며 왜 그들이 존경과 감사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그리고 17년 전 LA에서 흑인들의 폭동이 발생했을 때 왜 무고한 우리 교민들이 피해를 입어야 했는지를 새삼 비교하며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많이 가진 자는 덜 가진 자에게, 덜 가진 자는 더 못 가진 자에게 베풀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는 새로운 풍요를 창출하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넘치게 되어 상생(相生)의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왜 초대 교회인가요? 그것은 바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함에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는 말씀을 이루어야 합니다. <섬김과 나눔>이 도농(都農)간에, 큰 교회와 개척교회 간에, 세대간에, 지역 간에, 선.후배라는 우리 가운데 이루어 질 때 성육신(Incarnation)의 꽃은 만개(滿開)하며 탐스런 열매가 분명 맺혀지게 될 것입니다.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Ich und Du)라는 책을 통해 “당신이 있음으로 내가 존재 한다”고 했습니다. 명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껄끄러운 상대, 두 번 다시 쳐다보고 싶지 않고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 한 방 갈겨주고 싶은 사람, 벼락이라도 맞았으면 시원하겠다는 경쟁과 미움과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소중한 사랑의 대상으로서 서로 섬겨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 개혁고려신학교에서부터 초대교회 공동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이런 공존(共存)과 상생(相生)의 아름다운 삶이 구현되기를 소망합니다. 너무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청산하고 죄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의 무조건적인 헌신과 사랑이 우리 안에서 꼭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D-day와 V-day,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 사이의 긴장 속에 놓여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분투노력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촉발된 하나님의 나라가 가일층 우리들을 통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재림주를 통해 극치를 이루는 그 날에 그 기쁨을 만끽하며 우리 주님께로부터 잘했다 칭찬 받는 신학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희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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