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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론(김영재 교수)
김영재 교수 2010-05-22 추천 1 댓글 0 조회 2329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론

(The Doctrine of Atonement in Jesus Christ)

 

김 영 재 교수

DR. KIM YOUNG-JAE

 

Ⅰ. 서 론

 

본 강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중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속죄론에 관해서 다루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는, 희생(Sacrifice)으로써 이는 죄책을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하고도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인간에게 있는 죄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며,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그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책임여부를 묻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면 그것이 가장 인간에게 있어서 큰 절망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희생으로 인해 주어진 소망은 놀라운 것이다.

둘째는, 속죄(Propitiation)로써 이는 진노를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진노가 제거되었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 상에서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마디의 말씀인 가상칠언 중에서 네 번째 말씀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라는 말씀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통한 저주를 받아 하나님께로부터 죄인들을 대신하여 버림을 당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평상시에 성부 하나님을 부르실 때 아버지(Π?τερ)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는 저주받은 상태이므로 나의 하나님(μου Θε?-무 데에)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아람어인데 여기에서 마태는 '엘리 엘리'는 히브리어로 표현하였고, '레마(λεμα) 사박다니'는 아람어로 표현하였다. '엘리'는 하나님을 뜻하는 '엘(??)'에 1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것으로써 '나의 하나님'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아람어는 엘로이(????λωι)이다.

이 '엘로이' 는 마가복음 15장 34절에 기록되어져 있다. 마태는 히브리 독자들을 위하여 히브리어를 음역한 '엘리' 라고 표기하였고, 마가는 실제 당시에 예수님이 직접 사용하셨던 아람어의 음역 그대로 '엘로이' 라고 표기하였다.

마태가 아람어인 '엘로이' 를 같은 뜻의 히브리어인 '엘리' 로 바꾼 이유는 본문을 시편 22편 1절의 히브리어 본문과 일치시킴으로써 유대인 독자들을 고려하기 위한 것일수도 있고, 또한 47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과 같이 엘리야라는 발음과 더 유사한 발음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본문에서 '레마'는 아람어로써 '왜?' 라는 의문사인데 표준원문(Textus Receptus)에는 '라마(λα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 2위이신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를 범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제1위 이신 성부 하나님의 진노를 인류 대신 받아 모든 총체적인 고난을 당하셨다. 이 고난으로 하여금 진노를 제거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부르짖음이 이러한 사실에 입각한 절규인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 없으신 성자 예수님을 삽자가 상에 버리셔야 했으며, 성자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속죄제물이 되셔서 진노를 받아 버림을 당하셔야 했던 것이다.

지독한 절망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대신 버림을 당하셨기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부터 버림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셋째는, 화목으로써(Reconciliation) 이는 원수됨을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죄를 통해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들을 서로 화해시키기 위해서 십자가 상에서 화목제물이 되시어 양팔을 벌리시고 서로를 붙잡고 사랑의 심장을 터트리신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죄의 담이 허물어지고 화목하게 된 것이다. 요한일서 2장 2절의 말씀처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 이 되신 것이다.

요한일서 4장 10절 하반부에 기록된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넷째는, 구속(Redemption)으로써, 이는 노예상태를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죄를 통해 종의 멍에를 지게 된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시려고 십자가를 지셨기에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사도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말씀하셨다.

노예 해방으로 알려진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의 일화가 있는데  링컨 당시에 노예 시장이 있었다. 그 시장은 사람을 팔고 사는 시장인데 마치 짐승들을 파는 시장과 별 다를 바 없는 시장이었다. 굳이 차이점이 있다면 매매의 대상이 짐승과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어느 날 링컨이 그 노예 시장을 지나가다가 문득 오누이의 눈물을 보게 되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자신들이 노예로 팔려 가는 것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주인에게로 팔려 가기에 이제는 서로 영영 볼 수 없음에 우는 것이었다. 이에 링컨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이 오누이를 사게 되었다. 그러자 이 오누이는 링컨 앞에 무릎을 꿇고 또 다시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의 의미는 앞서 흘렸던 서러움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함의 눈물이었다. 이제 한 주인에게 팔리게 되었으니 영영 같이 지낼 수 있음에 감사하는 눈물이었다. 링컨은 그 오누이에‘가라 너희는 이제 자유의 몸이다.’ 라고 하며 그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워싱턴에 위치한 알링턴 국립묘지에 링컨의 기념관이 있는데 링컨의 동상 아래에 'THE MEMORY OF ABRAHAM LINCOLN IS ENSHRINED FOREVER'라고 쓰여져 있다. 이는 '아브라함 링컨의 죽은 뒤의 명성은 영원히 소중하게 간직될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앞에서 다룬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는 크게 네가지의 의미로 분류할수 있는데 이 중에서 가정 핵심적이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속죄이다. 이 속죄는 가장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진노를 제거한 것이다. 또한 이 속죄는 '덮는다(Cover)' 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덮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의 죄를 가리운다는 의미인 것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을 속죄제물로 드려 피를 흘리게 한 것 또한 이러한 속죄 즉, 덮는다, 가리운다의 의미인 것이다. 이 구약 시대에 드린 짐승들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으로써 히브리서 10장 4절의 말씀처럼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는데 이 말씀은 시편 40편 6절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구약 시편 40편 6절 상반부에‘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이란 구절을 신약 히브리서 10장 5절 하반부에 '한 몸을 예비하셨다.’라고 인용하였다. 이처럼 전혀 다른 문맥으로 인용하였다.

시편 40편 6절 상반부에 기록되어 있는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이란 구절이 ‘내 귀를 통해서 뚫었다.’ 로 인용되는데 헬라 사람들에게는 이 의미가 전혀 있지 않다. 그래서 구약의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에서는 '동물의 제사보다 내 몸을 하나님께 드려서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겠다.'라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내가 여러 가지 다른 희생 제사를 드리기 보다 내 몸을 드리겠다.’는 의미이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인데 이들은 구약을 볼 때 70인역을 주로 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시편 40편 6절을 인용할 때 구약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구약의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을 인용한 것이다. 그래서 시편 40편 6절에 ‘귀’라는 단어가 히브리서 10장 5절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인 ‘몸’으로 인용된 것이다. 이 예비한 한 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처럼 구약을 신약에 인용할 때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구약의 히브리어를 신약의 헬라어로 70인역(LXX)화 한 것을 인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속죄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흘리신 피만이 인간의 죄를 가리울수 있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였을 때 그들은 창세기 3장 7절 말씀과도 같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다. 그러나 이 치마를 수치를 다시 드러내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21절에 가죽옷을 저어 입히셨다. 이 가죽옷을 더 이상 수치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 가죽옷이 만들어 지기 위해서는 짐승이 피를 흘려야만 했다.

요한 칼빈의 누이와 결혼한 윌리엄 휘팅엄이 성경을 번역하였는데 창세기 3장 7절 말씀을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반바지를 하였더라.' 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이 성경이반바지 성경으로 유명해졌다. 또한 이 성경을 가리켜 휘팅엄이 번역한 도시의 이름을 따서 제네바 성경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제네바 성경의 또 다른 유래를 살펴보면 칼빈에게 제네바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자기들의 본국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증거 하였다. 1599년에 제네바 성경이 출판되었다. 이 제네바 성경은 1560년에 학생들이 원어를 직접 보고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또한 이 제네바 성경은 1644년까지에 걸쳐 200판까지 발간되었다. 이 제네바 성경의 마지막 판인 1644년 판은“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은 왕의 명령이 있어도 하지 말라”고 각주가 되어 있는데, 이 결과로 인해 제네바 성경은 1644년 판을 마지막으로 출판되지 못하게 되었다.

출애굽기 1장 16절에 애굽 왕이 산파에게 히브리 여인이 낳은 아이 중에서 남자여든 죽이라고 했는데, 17절에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을 각주 하면서 “독재자는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다.”라고 하며, 그리고 산파가 애굽 왕의 명을 어긴 것은 합법적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이 각주가 영국의 왕을 화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왕은 이러한 제네바 성경의 출판에 대한 죄에 대해서 묻게 되었고, 또한 왕은 제네바 성경이 중단되면 사람들이 다른 성경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성경을 출판할 때에 각주가 없는 성경을 출판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결과로 인하여 출판된 것이 각주가 없는 성경인 킹 제임스(KING JAMES) 성경인 것이다.

70인경의 유래를 살펴보면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에 가서 모여 살다가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게 되었는데 그 결과로 인해서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70인경(LXX)인 것이다. 이처럼 칠십인역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인데 구약 정경 이외의 다른 책들인 외경이 추가되어 있다. 그래서 헬라어역본이라고도 한다.

칠십인역을 영어로 『SEPTUAGINT(셉튜아진트)』라고 하는 이유는 이 번역본의 번역을 알렉산드리아 학자 70명(혹은 72명)이 B.C. 284-247년경의 톨레미 Ⅱ세 필라델푸스(Ptolemy ⅡPhiladelphus) 왕조시대 때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하였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영어 『SEPTUAGINT(셉튜아진트)』라는 말은 ???칠십(70)???을 뜻하는 라틴어 『SEPTUAGINTA(셉튜아진타)』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기에서 로마 숫자인 LXX라는 약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70인역이라는 의미로 『LXX INTERPRETES』라고도 한다.

신명기는 70인경(LXX)의 제목이다. 70인경은 두 번째 명령이라는 의미를 풀어서 신명기라고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신명기가 모압 땅(1:5)에서 시내산의 언약을 풀어서 새로운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칠십인역에서는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 상, 열왕기 하,를 통틀어 왕국기(REGNORUM)라고 부르며, 이를 Ⅰ,Ⅱ,Ⅲ,Ⅳ, 로 구분한다. 이는 사무엘서에서 이스라엘의 왕국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한나가 사무엘을 낳아 이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을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되고, 솔로몬 이후 남과 북으로 분열되어지고, 남쪽 유다는 20대 왕인 시드기야를 마지막으로 끝이 나고, 북쪽 에브라임은 19대 왕인 호세아를 마지막으로 끝이 나게 된다. 열왕기하 17장에서는 북쪽 이스라엘 왕 호세아의 멸망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고, 24장에서는 남쪽 이스라엘인 유다와 시드기야의 멸망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 왕국은 사무엘 상에서 시작하여 열왕기하에서 멸망하여 끝나게 된다. 이러한 연관성의 의미를 통해서 70인 역에서는 왕국기로 분류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한 나라로서 통일왕국을 이루었지만 솔로몬 이후에 남과 북으로 나뉘어지는 분열왕국 시대를 맞이하였다. 남 유다는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통치하였고, 북 에브라임은 여로보암이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이 B.C. 722년에 멸망하게 되에 남 유다만 남게 되는 단일 왕국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 유다도 끝내는 B.C.58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참고적으로 70인경의 목차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SEPTUAGINTA, LXX INTERPRETES

 

 

VOLUMEN Ⅰ LEGES ET HISTORIAE (역사서)

 

※ 아래의 밑줄친 부분은 외경며, 장과 절수가 기록된 이유는 개역성경과의 차이점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01] GENESIS / 창세기 --------------------------- page 1

02] EXODUS / 출애굽기 ----------------------------- 86

03] LEUITICUS / 레위기 --------------------------- 158

04] NUMERI / 민수기 ----------------------------- 210

05] DEUTERONOMIUM / 신명기 ---------------------- 284

06] IOSUE / 여호수아 ----------------------------- 354

07] IUDICES / 사사기 ----------------------------- 405

08] RUTH / 룻기 -------------------------------- 495

09] REGNORUM Ⅰ / 사무엘상 ----------------------- 502

10] REGNORUM Ⅱ / 사무엘하 ----------------------- 565

11] REGNORUM Ⅲ(22:54) / 열왕기상(22:53) ------------ 623

12] REGNORUM Ⅳ / 열왕기하 ----------------------- 693

13] PARALIPOMENON Ⅰ / 역대상 -------------------- 752

14] PARALIPOMENON Ⅱ / 역대하 -------------------- 811

15] ESDRAS Ⅰ/ 에스드라상 -------------------------- 873

16] ESDRAS Ⅱ(23:31) / 에스라(10장), 느헤미야(13:31) ---- 903

17] ESTHER(10:3 a,b,c,d,e,f,g,h,i,k,l) / 에스더 ----------- 951

18] IUDITH / 유딧서 ------------------------------ 973

19] TOBIAS / 토비트서 ---------------------------- 1002

20] MACHABAEORUM Ⅰ / 마카비서 ----------------- 1039

21] MACHABAEORUM Ⅱ / 마카비서 ----------------- 1099

22] MACHABAEORUM Ⅲ / 마카비서 ----------------- 1139

23] MACHABAEORUM Ⅳ / 마카비서 ----------------- 1157

 

 VOLUMEN Ⅱ LIBRI POETICI ET PROPHETICI (예언서)

 

24] PSALMI(151:7) / 시편(150:6) ------------------- page 1

25] ODAE / 찬송? -------------------------------- 164

26] PROUERBIA / 잠언 ---------------------------- 183

27] ECCLESIASTES / 전도서 ------------------------ 238

28] CANTICUM / 아가 ----------------------------- 260

29] IOB(42:17 a,b,c,d,e) / 욥기 ----------------------- 271

30] SAPIENTIA / (솔로몬의) 지혜서 -------------------- 345

31] SIRACIDES / (벤시락의) 집회서 -------------------- 377

32] PSALMI SALOMONIS / 솔로몬의 시편 --------------- 471

33] OSEE / 호세아 ------------------------------- 490

34] AMOS / 아모스 ------------------------------- 502

35] MICHAEAS / 미가 ----------------------------- 512

36] IOEL(2:27, 3:5, 4:21) / 요엘(2:32, 3:21) ------------ 519

37] ABDIAS / 오바댜 ------------------------------ 524

38] IONAS(1:16, 2:11) / 요나(1:17, 2:10) --------------- 526

39] NAHUM(1:14, 2:14) / 나훔(1:15, 2:13) -------------- 530

40] HABACUC / 하박국 ---------------------------- 533

41] SOPHONIAS / 스바냐 --------------------------- 538

42] AGGAEUS / 학개 ----------------------------- 542

43] ZACHARIAS / 스가랴 --------------------------- 545

44] MALACHIAS(3:24) / 말라기(3:18, 4:6) -------------- 561

45] ISAIAS / 이사야 ------------------------------ 566

46] IEREMIAS / 예레미야 --------------------------- 656

47] BARUCH / 바룩서 ----------------------------- 748

48] LAMENTATIONES / 예레미야애가 ------------------ 756

49] EPISTULA IEREMIAE / 예레미야의 서신 ------------- 766

50] EZECHIEL / 에스겔 ---------------------------- 770

51] SUSANNA / 수산나 ---------------------------- 864

52] DANIEL / 다니엘 ------------------------------ 870

53] BEL ET DRACO / 벨과 용 ----------------------- 936

※( )안에 있는 것은 내용상의 연관성이 있음

(PSALMI, ODAE), (IEREMIAS, BARUCH, LAMENTATIONES, EPISTULA IEREMIAE),(SUSANNA, DANIEL, BEL ET DRACO)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짐승이 피를 흘려 가죽옷을 제공하여 가리운 것처럼 죄인들의 죄를 가리우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피를 흘리셔서 속죄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속죄에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당해야할 진노를 당해 제거한다는 의미는 있지만 죄를 가리운다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통하여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들이 화해하게 되고, 죄로 말미암아 노예된 우리들이 멍에를 벗고 자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자유는 인간의 그 어떠한 산물에서 나오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나오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를 원하거든 자유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구약시대의 속죄의 개념은 짐승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가리운다는 것이었지만 신약시대의 속죄의 개념은 가리운다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어 제거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네가지의 개념 또한 모두다 하나같이 제거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요한복음 1장 29절 후반부에 기록된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의 킹제임스(KJV) 번역은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다. '지고 가는' 에 해당되는 영어는 'take away' 로서 이는 '지고 가다.' 라는 의미도 있지만 '제거한다, 없애다.' 라는 뜻도 있다. 요한 일서 3장 5절에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 말씀에서 '없이' 에 해당하는 영어는 'take away' 이다. 또한 '지고 가는' 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이론(α?ρων)은 '아이로' 의 현재 분사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성취된 것이지만 그 효력은 믿는 자들에게 영원토록 유효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아이로' 는 '지고 간다' 라는 뜻도 있기는 하지만 '제거한다' 라는 의미가 본 구절에서는 더 적절한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속죄의 제물로서의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것이다. '지고간다' 라는 의미는 죄를 완전히 없앤다는 의미보다는 감당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므로 복음적이라기 보다는 율법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제거한다' 라는 의미로 바꾸는 것이 더 합당한 것이다. 예수님께 붙여진 위대한 칭호인 하나님의 어린양은 세례요한에 의해서 붙여진 것이다. 이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서만 기록되어져 있으며, 통틀어서 신약성경에 단 네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요한복음 1장 29절과 36절, 사도행전 8장 32절, 베드로전서 1장 19절에만 기록되어져 있다. 이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속죄의 의미를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이 어린양의 앞에 하나님을 표기하여 '하나님의 어린양' 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구약의 유월절 어린양을 염두해 두고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속죄 제물은 그 어떤 것도 결코 될 수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 뿐이신 것이다. 구약시대에 수없이 많은 짐승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속죄제물이 되어 피를 흘렸지만 그 피는 결코 죄를 없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드림으로써 모든 죄를 없이하시고 제거하신 것이다. 이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진노로써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역사를 종결지으실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어린양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어린양이라는 표현의 주된 목적은 그가 바로 온전히 죄를 속하는 속죄양이라는 의미이다. 5장 12절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속죄제물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속죄제물이 되셔서 모든 죄를 제거하신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5장 13절의 말씀처럼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려야 함이 지극히 합당한 것이다. 이제 이 속죄제물이 되셔서 죄를 제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6장 16절에 진노하심으로 악인들을 심판하시게 되시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어린양의 진노' 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7장 10절에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14절에는 '어린양의 피' 라고 기록되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피'의 개념은 속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13장 8절에서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 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 은 역시 속죄를 의미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생명책이라는 의미는 구원받은 자를 기록한 책이라는 의미로써 이 생명책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끝으로 19장 6절에서 '어린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렀다' 라고 하는데 이는 구원받은 자들의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어린양이라고 표현하여, 요한복음과의 일치성을 나타내며, 그 어린양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만이 온전한 구원이며, 그 속죄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역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어서 최후의 심판을 하심을 기록하였다. 이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앞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예외일수가 없다.

 

Ⅱ. 본 론

 

1. 레위기에서의 속죄제와의 연관성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시대에 돌물의 제사를 통해서 예표되어 왔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범죄하였을 경우에 제사장을 통하여 흠없는 동물들인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 등을 자기 대신에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다. 이는 짐승들이 죄인들에게 있어서 대리적으로 속죄 제물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들 자체가 죄가 있어서 제물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죄 때문에 제물이 된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제물이 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죄로 인하여 속죄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명확하게 말한다면 대리적 속죄(The Vicarious Atonement)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의미인 것이다.

레위기 4장과 5장에 속죄제에 대해서 기록되어져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면 희생의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로 나아가는데 제사장은 짐승의 머리위에 안수하게 되고, 이를 통하여 죄인의 죄가 짐승에게로 전가되어 짐승이 속죄제물이 되어 대신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죄인은 죄를 사함 받고 고난과 형벌과 희생을 면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구약시대의 희생의 속죄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이다. 그리고 구약시대에는 백성들이 죄를 범할때마다 짐승들이 죽어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모든 죄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반복적인 죽음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속죄제물이신 것이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고 기록되어져 있다. 여기에서 '오직 자기 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δι? δ? του ?δ?ου α?ματο? (디아 데 투 이디우 하이마토스)'인데 이 의미는 '그러나 자기 자신의 피를 통하여' 이다.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아론계통의 제사장과의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대제사장들은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갔다. 그 이유는 송아지 피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염소 피는 백성들을 위한 속죄물인 것이다(레 16:11-15). 그리고 그 피의 제사는 계속하여 반복되었다. 이는 속죄제가 해마다 이루어져야만 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그 피가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짐승의 피 대신에 자신의 피를 직접 십자가에서 흘리신 것이다. 그리고 그 피의 제사는 단 한번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이미 구약에서부터 짐승의 죽음으로 모형적으로 예언된 것이고,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그리스도 밖에(Out Christ)에 있는 자들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과도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미련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때부터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2. 이사야에서의 속죄제와의 연관성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구원할 것을 계획하시고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300번 이상이나 예언하셨는데 대선지자인 이사야를 통해서 상세하게 예언하셨다. 특별히 이사야 5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는 종으로써 십자가에 속죄제물이 되실 것을 예언하였다. 이사야 52장 13절부터 고난받는 종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 52장은 15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12절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사야 53장은 52장 13절부터 시작해야 맞는 것이다. 이사야 42장, 49장, 50장, 53장, 61장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고난받는 종의 노래이다. 이 다섯 개의 장에서 여호와의 종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사야 53장을 이룰 수 있는 분임을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이사야서 53장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유대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성경을 읽어 줄 때 이사야 53장은 그리스도인들 것이라며 읽어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사야 52장 13절(53장 1절)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해서 말해주고 있으며, 53장 5절에서는 속죄의 의미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52장 13절로 15 절은 그의 부활하심을 묘사하고 있다. 열왕들이 입을 봉할 만큼 높아지신다. 고난받는 종이 왕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보다 더 큰 제사장이시다. 15절에 상반부에 ‘열방을 놀랠 것이며’ 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sprinkle'이라는 단어로 가록하였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물을 뿌려 세례를 준다.' 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제사장의 사역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종이시지만 가장 높은 왕이시다. 모든 열방에게 세례를 주시는 전 세계의 제사장이시다.

53장 1절로 2절은 그의 태어나심과 어렸을 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2절 상반부에 나오는 '연한 순’을 잘라 내지 않으면 잎사귀만 무성하기 때문에 떼어 낸다. 떼어 낼 때에 칼도 필요 없다. 아주 약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쉽게 떼어 버릴 수 있는 연한 순 같다는 것이다. 이 일을 헤롯이 하려고 했다(마 2:16).

53장 3절로 4절 상반부는 그의 인간됨을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종을 보기 싫어서 얼굴을 가리웠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시는 분으로 묘사하였다. 마태복음 8장 17절 하반부에‘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묘사하였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의 질병을 예수님의 몸으로 흡수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죄가 없으면 질병도 없다. 이 질병을 없애기 위해서는 누군가 죄를 담당해야 한다. 모든 질병들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흡수하였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나 소경을 고치실 때 그들의 질병이 예수님께 흡수되었다. 이 일이 실질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그 값을 치루신 것이다. 그 때는 바로 십자가에 죽으실 때이며 , 속죄제물로 바쳐질 때이다. 질병의 마지막인 죽음으로 담당하셨다.

53장 4절 하반부에서 7절은 그의 고난받으심을 묘사하고 있다. 몸으로 행한 죄는 그 몸에 고난을 받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고난을 받으면 예외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단지 영적인 고난만이 아니다. 비록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분리의 고난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육체의 고난을 당하셨다. 이유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서이다. 이는 바로 속죄 제물이 되셨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58편 3절에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 도다.” 라고 말씀한다 이처럼 6절 상반부에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죄는 고백되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조건 없이 예수님께 담당시킨 것이 아니라 각기 제 길로 갔다고 고백한 사람들의 죄를 담당시킨 것이다. 구원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행하신 것이다. 아들은 자발적으로 아버지께 순종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7절 상반부의 말씀처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고 순종하셨다.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은 동의한다는 의미로 중요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를 아들에게 담당시키시고 아들은 기꺼이 응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침묵하셨다. 이 침묵이 온전한 속죄제물이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3장 8절은 그의 재판 받으심과 죽으심을 묘사하고 있다. 다윗이 인구조사의 죄를 범하고(삼하 24:10), 그 결과로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되었다(삼하 24:12). 그러자 다윗은 하나님께 맡기고 다만 자신이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했다(삼하 24:14下). 짐승에게 당하는 것보다 인간에게 당하는 것이 참혹하다. 십자가에 죽이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하다. 등을 채찍으로 때려 피가 나게 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 수치를 당케 했다.

빌라도는 3번에 걸쳐서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말하고(요19:6下), 십자가에 내어 주었다(요19:16).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죄가 아닌 자신의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 죄인들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범과 때문에 아들에게 대신 고난을 주셨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에 한 가지의 죄 때문에 두 번 벌을 주지 않으신다.

이사야 53장에 고난받는 종은 70인역(LXX, SEPTUAGINTA)에 이 종을 파이스(Παιs)로 번역했다. 노예라는 뜻을 가진 둘로스(δουλοs)로 쓰지 않았다. 고난받는 종이 나중에 영화로운 아들이 될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사도행전 3장 13절 상반부에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 종도 원문에는 파이스(Παιs)로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3장 19절로 26절은 베드로의 설교의 결론 부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분임을 입증하고 있다.

26절에 종은 둘로스(δουλοs)가 아니라 파이스(Παιs)이다. 이 파이스(Παιs)는 종의 뜻도 있지만 아들의 뜻도 있다. 예수님은 종이심과 동시에 아들이신 것을 이 파이스(Παιs)가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사도행전 3장 13절과 26절에서의 종은 킹제임스 성경(KJV) 에서는 아들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십자가상에서 온전한 속죄제물이 되신 것인데 특별히 5절 말씀처럼 네가지의 형태로 구성되어져 있다.

첫째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인데,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범한 죄악이 중대하여 단순히 짐승이 제물로 바쳐져서 피를 흘리는 것으로 덮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범죄한 자신이 쪼개져 피를 흘리는 것으로도 덮어지지 않는다. 오직 그 죄악이 덮어지는 곧 속죄되는 유일한 것은 죄가 하나도 없으신 완전하신 의로운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제물로 죽으시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찔린다'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홀랄' 인데 이의 원형인 '할랄(???)은 문자적으로 '구멍을 뚫는다' 라는 의미이다. 이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할 고난과 고통을 총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써 가시면류관에 머리를 찔리시고, 대못으로 손과 발에 못박히시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바로 우리의 허물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밉페솨에누'인데 이의 원형인 '페솨으(???)'는 반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소한 실수의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인데, 여기에서 '그가 상함은'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둑카' 의 원형인 '따카(???)' 는 단순히 피부가 상하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짓밟혀 뼈가 완전히 으스러지는 치명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에서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라고 번역하였다. 즉 본문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이 완전히 으스러져버릴 정도로 견디기 힘든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난은 사실상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범한 우리 인간이 당해야 하는 고난인 것이다.

셋째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인데, 이는 죄인인 우리들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게 되면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고 하나님께로 나아갈수 있게 되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상처를 입게 되셨음을 의미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온전한 회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체찍에 맞음으로'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바하부라토' 의 원형인 '합부라(?????)는 매질로 인한 큰 상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에서는 이를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체찍에 맞으심은 육체적인 고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고난을 포괄하는 것으로써 '나음을 입었도다.' 의 의미 또한 인간의 육체적인 회복은 물론이고, 정신적, 영적인 회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한 속죄제물이 되시어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10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말씀이며, 그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며, 그이 죽으심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신 것도 아닌 것이다. 더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기뻐하셨다. 이는 그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 미칠 구원에 대한 기쁨인 것이다. 이 구절에서 속건제물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는데 킹제임스 성경(KJV)에서는 속죄제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속죄제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모든 경우에 드려지는 제사로서 그 범위가 넓은 것이 특징이며, 속건제는 주로 하나님의 권위나 이웃의 권리를 침해한 경우에 드려지는 제사로서 그 범위가 좁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속건제는 속죄제의 특별한 경우이다. 그러므로 속건제를 가리켜 '제 2급의 속죄제'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속건제는 남의 권리나 재산을 침해한 사실에 대하여 그 책임을 느끼고 보상하며 용서를 구하는 제사이다. 이웃에게 해를 끼친 것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데서 나온 결과이므로 하나님께도 속죄해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사야 53장 3절에 '질고를 아는 자라' 고 기록되어 있는데 1993년 3월에 발행된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로 번역하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병든 자로 취급하는 것인며, 더 나아가서는 그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구원을 말살시키는 심각한 것이다. 비단 이 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오역이 발견되어 이 성경은 나온 지 얼마 안되이 폐간하게 되는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재 수정하여 개정판을 쓰기로 했고, 2001년 11월에『표준새번역 개정판』을 발행하였는데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로 출판하게 되는 큰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비록 예수님이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인성을 다룰 때에 신성적인 측면으로 다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3. 속죄의 대리성

 

1) 제사장직의 대리성

 

구약시대의 제사장직에서 속죄의 대리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중에서 선택된 자들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이다.

히브리서 5장 1절에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또한 제사장은 2절 말씀처럼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 으로 3절 말씀처럼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 한 것이다. 이 제사장의 직무의 기능은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범죄한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제사장의 직분에서 속죄의 대리성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하신 대제사장이심을 모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통해서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였지만 신약의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직접 피를 흘리심으로써 죄인들의 죄를 속죄하셨다.

도피성 사건을 살펴보면 대제사장의 속죄의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다. 민수기 35장 28절에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유하였을 것임이라. 대제사장의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수 있느니라.' 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 민수기 35장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분배하는 가운데 레위인들이 받게 될 48성읍에 관해서 말하고 있으며, 그 중에 6성읍은 살인자로 피하게 하는 도피성이고, 그 외에 42성읍이라고 6절에 기록되어져 있다. 이 도피성은 그릇 살인한 자가 피하는 곳이다. 고의성이 없이 남을 죽인자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도피성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12절 후반부에 기록된 말씀처럼 '회주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 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 인 것입니다. 도피성으로 가게 된 고의성이 없는 살인자는 25절 후반부의 말씀처럼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도피성 밖으로 나오게 되면 27절의 말씀처럼 피를 보수하는 자에게서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절의 말씀처럼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대속의 의미로써 대제사장이 도피성안에 있는 살인자의 죄를 대신해서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그가 피를 보수하는 자에게서 죽음을 당하지 않는 것이며, 피를 보수하는 자는 더 이상 살인자에게 피값을 요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흔히 도피성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예표로 말해왔지만 이는 성경을 잘못 본 처사이며, 궁극적으로 이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가 없는 것이며, 대제사장의 죽음이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7절에 기록되어 있는 '자기를 비었다.' 라는 말의 의미를 흔히 성욱신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는 의미이빈다. 이는 하늘로서 내려왔다는 측면으로서 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역적인 측면으로서 비었다는 의미입니다.

 

2) 희생제물의 대리성

 

구약시대의 희생 제사에서 속죄의 대리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구약시대는 제사를 드리는 자가 희생제물을 가지고 왔으며, 그 희생제물 위에 손을 얹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다. 제사장이 죄를 범하였으면 제사장이, 백성이 죄를 범하였으면 백성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온 백성이 죄를 범하였으면 대제사장이 자신들의 희생 제물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였다. 이 안수는 죄를 범한 자들이 자신들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죄를 전자받은 제물은 제사드리는 사람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제사드리는 자가 죄의 형벌을 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희생제물의 대리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를 잘못 인용한 자가 있다. 그는 연세OO교회 담임 목사이자 수원 흰OO 기도원을 운영하고 있는 윤 모목사이다. 그는 말하기를 '회개할 때에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 죄가 마귀에게로 돌아가 마귀는 쑥대밭이 됩니다.' 라고 했다 이는 신자가 회개하면 그 죄가 마귀에게 전가되고 그 결과로 인해 마귀가 멸하게 된다고 한다. 즉, 회개하는 목적이 죄를 용서함 받는 것이기 보다는 마귀를 멸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무지한 소치이며, 허무맹랑한 소리이다.

희생제물의 대리성을 크게 5가지로 분류할수 있다. 첫째는,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로써 여기에서 속죄의 대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레위기 4장 3절에 '만일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 그 범한 죄를 인하여 흠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이므로 제사장이 범죄한 것은 곧 백성들이 범죄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때에는 속죄를 위하여 자신이 흠없는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머리위에 안수하고 희생제물을 잡는 곳인 제단 북쪽에서 잡아 제사를 드렸다. 제사장은 손가락에 피를 찍이 지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나머지 피는 번제단 밑에 쏟았다. 그리고 기름들은 번제단 위에 놓고 불사르고 나머지는 재 버리는 곳에서 불태우게 되었다. 이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에서 수송아지는 제사장을 대신하여 희생당하였다. 이것이 바로 속죄의 대리성인 것이다(레 4:3-

-12).

둘째는,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로써 여기에서 속죄의 대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이 범죄하면 예물과 화목제물을 제사장에게로 가지고 갔으며, 제사장은 범죄한 사람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렸다. 이때에는 온 회중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머리위에 안수하고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 이 회중을 위한 제사의 규례는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와 동일하였다. 이 때에 수송아지는 온 회중의 죄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레 4:13-21).

셋째는, 온 백성을 위한 속죄제로써 여기에서 속죄의 대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백성들이 범죄하면 수염소 두 마리를 가져다가 제사장이 제비를 뽑아 그 중에 한 마리를 희생제물로 드렸다. 제사장은 수염소 머리 위에 안수하고 온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와 불의를 고백하고 죄를 희생의 제물에게 전가 시킨후 잡아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미리 정한 사람으로 하여금 산채로 광야에 내보내어 풀어 놓았다. 이때 수염소는 제사드리는 자들의 모든 불의를 대신 짊어졌음을 의미한다. 이 때에 광야로 보내진 염소는 8절의 말씀처럼 아사셀을 위하여 보내지는 것인데 이 의미는 악령에게 보내지는 염소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아사셀은 '내어 보내진 염소' 혹은 '속죄의 염소'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악한 세력의 우두머리를 뜻하기도 한다. 즉 악한 죄의 세력의 우두머리인 아사셀에게 염소를 보내는 것은 그 염소에게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게 하여 모든 죄를 다시 아사셀에게 보낸다는 상징적인 의미이다(레 16:15-22).

넷째는, 백성의 지도자들을 위한 속죄제로써 여기에서 속죄의 대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족장이나 지도자가 범죄하면 흠 없는 수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범죄한 자가 그 수염소의 머리위에 안수하고 제사장은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제물을 잡아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 제단의 뿔위에 붓고 나머지는 제단 밑에 부으며 고기의 기름 부분은 제단 위에 놓고 불사르고 제물의 고기는 자신과 가족 식구들을 위하여 음식으로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지도자들은 속죄함을 받게 되었다. 제단의 4뿔은 속죄의 능력을 상징한다. (레 4:22-29).

다섯째는, 백성 중에 한 사람을 위한 속죄제로써, 여기에서 속죄의 대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일반 사람이 범죄하면 흠 없는 암염소나 또는 흠 없는 암양을 가져다가 머리 위에 안수하고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 그 나머지 의식은 지도자들을 위한 속죄제와 동일하다.

이처럼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에 의하여 반복된 동물의 희생제사는 범죄한 자의 죄를 제거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하여 드려야만 했다. 이 모든 동물의 제사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예수님은 요한이 증거하듯이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인 것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더 이상의 속죄 제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더 이상의 동물들의 희생이 필요치 않는 것이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의 죄를 구속하는 것은 물론이고, 짐승들의 죽음을 금하는 것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짐승들은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물로써 희생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속죄제물로써 죽으심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죄ㄹ르 제거하기란 불가능하였고, 완전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반복하여 제사를 드려도 끝이 없었다. 구약시대의 제사때에 드려지는 희생의 제물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Shadow)이고, 모형(type)이며, 상징(Symbol)일 뿐이다. 이러한 모든 것의 실체(Anti-Type)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희생의 어린양으로써 속죄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하여 그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기독신자들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죄인)로 여기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받을 형벌을 대신하여 받으셨다. 그 형벌이란 십자가상 에서의 죽으심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택자들의 죄값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죄를 위하여 죽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은 온전한 속죄의 죽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때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세례란 죄인들이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실때에 죄를 담당하셨다기 보다 세례를 받으실 때에 죄를 담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과로써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4. 속죄의 범위

 

속죄의 범위에 관해서는 많은 신학적 논쟁들이 있어 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에 관한 문제는 귀추가 주목되는 것이다. 온 세상 사람인가? 아니면 택자들만인가?라는 질문에 과연 자신있게 답할 수가 있는가의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마태복음 1장 21절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 백성' 인 것이다. 고로 택한자들이며,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택한 자들인 것이다.

이 속죄의 범위의 관한 문제는 구속의 적용에 관한 문제이다. 이 적용은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시키지 않으시고 택자들에게만 적용시키신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택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속의 적용은 무제한적이 아니라 제한적인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객관적인 구속사역을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만 주관적으로 적용시키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또한 누가복음 2장 14절의 말씀처럼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 인 것이다. 즉, 택자들을 위한 평화인 것이다. 유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지만 택자들은 속죄의 의미를 밝히 알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이 속죄의 범위에 관해서는 주로 세가지의 학설이 있다.

첫째는, 무제한적 보편주의로써 이는 보편적 구원설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주로 자유주의자들의 학설이다. 이 학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고 한다. 이 견해는 곧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하시기로 의도하였으므로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견해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이 무제한적 보편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이 취하는 '만인구원설' 이다. 무제한적 보편주의는 무제한적 속죄(Unlimited atonement)를 의미한다. 이 자유주의자들이 보편적 구원설을 주장하는 것은 죄 문제를 경솔하게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의 전적타락과 부패, 그리고 무능을 바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로 인해 그와 같은 허무맹랑한 낭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면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구원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성경은 구속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통하여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를 말씀하고 있다.

둘째는, 선택적 보편주의로써 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학설이다. 이 학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구원을 완성하였으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구원이 만민에게 제공되었으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아의지에 의하여 구원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아의지에 의하여 구원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다 구원을 받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각 개개인에 의하여 받아들여질때에 비로소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 학설에 의하면 인간의 최종적 구원 여부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고, 인간의 자아의지에 의한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받기 전에 영혼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기 때문에 의식이 있을수가 없으므로 자아의지에 의하여 구원을 선택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날의 감리교는 이 알미나안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신인합동설을 주장하는데 이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만 있지 아니하고 인간이 그 선택에 응해야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셋째는, 제한적 특수주의로써 이는 제한적 구원설이라고도 하며, 칼빈주의의 교리이다. 이 제한적 구원론은 속죄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바로 이해한 칼빈주의(Calvinism)의 교리이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선택함을 받은 자들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계획에 의하여 선택함을 받은 자들만의 속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선택함을 받은 자들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속죄의 성질은 제한적임을 제시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 한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는 곧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니 속죄의 의미 자체가 제한적임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교리를 가리켜 제한적 속죄라고 한다.

윌리암 쉐드(William G. T. Shedd)는 속죄의 범위를 수동적 의미와 능동적 의미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속죄의 수동적 의미는 속죄의 가치와 능력은 모든 시대, 온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속죄의 가치와 능력은 무제한적이다. 이는 만약에 속죄할 대상이 택자들인 것처럼 속죄의 능력도 택자들에게만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여기면 하나님의 능력을 축소하는 것이 되기에 하나님은 능력의 원천이시므로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할 만한 능력이 있으시지만 자신이 택한 사람들만을 구원하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속죄의 능동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성령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개인들에게 적용시키시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누구에게 효과적으로 적용되는가? 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은 성부 하나님께서 '택한 자' 이다. 이러한 특별한 의미에서 속죄는 당연히 제한적인 것이다.

이처럼 수동적 의미에서 속죄의 가치와 능력은 무제한적이요, 능동적 의미에서 속죄의 범위는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수동적 의미는 속죄의 가치와 능력을 의미하며, 능동적 의미는 속죄의 적용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예수님께 주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아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말 그대로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택자의 범위안에서 모두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용어들은 보편적인 용어들이면서도 제한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제한된 속죄의 범위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진리를 증거하는 성경구절들을 여덟가지로 살펴 보겠다.

첫째로, 사도행전 13장 48절이다. 이 말씀 중에 '영생을 주시기로 정해진 자들은 다 믿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인간의 창의적 기교를 전부 발휘하여 이 말씀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무디게 만들고 이 말씀의 명백한 의미를 회피하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말씀에서 네 가지의 교훈을 얻을수가 있는데 첫째, 믿음은 하나님의 작정하심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둘째, 오직 제한된 수의 사람들만이 영생을 얻도록 정해져 있다. 만일 하나님이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선택하셨다면 정해진 자들이라는 표현은 무의미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이 정하심은

단지 외적인 특권이 아니라 영생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넷째,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정한 모든 사람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믿음을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지극히 분명해진다.

둘째로, 디모데 전서 2장 4절이다. 이 말씀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고 기록되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란 택자들, 곧 영생을 주시기로 정하신 자들을 의미한다. 본 구절에 대한 해석에 대한 차이점으로 17세기에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 논쟁의 쟁점은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본절을 근거로 해서 보편 구원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절에 기록된 모든 사람을 모든 인류로 간주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섭리가 모든 인류를 포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사람으로 번역된 헬라어 ‘π?νταs ?νθρωπουs' (판타스 안드로포스)는 모든 인류를 다 포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에 바울이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면 여기에 정관사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관사가 사용되지 않은 것은 양적 측면에서의 전 인류가 아니라 질적 측면에서 즉, 계층이나 인종이나 국적의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므로 본절은 그 문맥상 인종이나 피부 색갈이나 지위나 신분의 구별없이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인 것이다. 성경은 만민이 모두 구원받는 만민 구원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만이 구원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며 영생을 얻는다는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론이 타당함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로, 로마서 11장 5절로 6절이다. 이 말씀 중에 ‘이와 같이’라는 말은 바로 앞 구절인 4절에 기록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사람 칠 천을 남겨두었다.’는 말씀을 고려하도록 만든다. 특히‘남겨 두었다’ 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엘리야 시대에 우상숭배에 물들지 않도록 경건하게 보존되고 참된 하나님에 대해서 알도록 이끌림을 받은 사람이 칠천명(매우 적은 수)이 있었다. 이러한 보존은 그들 자체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특별하신 영향력과 활동하심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처럼 남겨두신 이 사람들은 정말로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이처럼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남은 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바로 그렇게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사야 6장 13절에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 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멸망 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계획이 좌절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소망을 안겨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계속해서 악을 고집하는 완악한 백성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소망가운데 돋아나게 하시는 거룩한 씨이다. 즉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들과 다윗을 비롯한 의로운 왕들에게 부여하신 언약을 성취시키시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남아 있다’ 라는 말은 ‘돌아오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그루터기로서 거룩한 씨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는 자가 아니다. 포로로 잡혀갔을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잃지 않고 결국 약속의 땅으로 귀환하여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이어나간 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이 말씀중에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 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선택의 원인을 그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이 이 남은 자를 선택하신 근거는 그들 안에 있는 예견된 신앙이 아니다. 예견된 선행에 입각한 선택은 마찬가지로 행위를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우라면 은혜에 속한 것이 아니다. 6절의 말씀에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는 만일 은혜에 의해서라면 더 이상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은혜와 행위는 서로 상극을 이루며 서로 공통점이 없고 따라서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택함받은 자들 속에서 고유한 선을 예견하셨다는 생각은 단호히 배제된다. 그러므로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 라는 이 말은 무조건적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서 나온 결과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절대적으로 값없는 선택인 것이다.

넷째로, 고린도전서 1장 26절로 29절이다. 이 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세 번 언급한다. 택하심은 선별 즉, 어떤 것들을 골라내고 다른 것들은 내버려두는 것을 반드시 전제한다. 여기에서 택하시는 이는 반드시 하나님이시다. 이 말씀에서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는 자들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높이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생각 뿐만 아니라 그 방법도

사람의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육적인 마음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자들과 사교적이고 교양있는 자들의 계층에서 선발하여 그 화려함과 육적인 영광에 의하여 기독교가 세상의 평판과 갈채를 얻도록 하였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 받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이에 대해서 누가복음 16장 15절 후반부에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천한 것들을 선택하신다. 그 실례로 거룩한 말씀을 담당케하고, 약속된 자손이 오시는 통로로 삼으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민족은 고대의 애굽 족속도, 위풍당당한 바벨론 족속도, 문명과 문화가 발달된 그리스인들도 아니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부어주시고 자기 눈동자처럼 아끼신 그 민족은 경멸받고 방랑하는 히브리 족속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 지금의 증가 추세로라면 아마도 머지 않아서 큰 은혜를 입은 미국보다도 경멸받는 중국에서 신자들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문화적인 독일에서보다도 비문명적인 아프리카 흑인들 가운데에서 신자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 즉, 하나님이 택하심이 존재하는 목적은 29절의 말씀처럼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기꺼이 그 모든 영광과 찬송은 지극히 풍성하신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다섯째로, 에베소서 1장 3절로 5절이다. 이 말씀에서 시간이라고 볼 수 있는 어떤 시점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자녀가 된 자들을 선택하신 그 시기를 언급한다. 그것은 아담이 타락하여 인류를 죄와 비참함 속에 밀어 넣은 이후가 아니었다. 아담이 빛을 훨씬 보기 전에,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택자들과 연계해서 세우신 목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자기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또한 자녀로 입양하는 것과 유산을 상속받도록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동기는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사랑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자녀로 받아주셨다. 이러한 진술은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 영원한 운명을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은 독재적이고 불공정하다고 종종 제기하는 사악한 혐의를 논박한다. 여기에서 배우는 마지막 교훈은,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를 어느 누구와도 협의하지 않으시고 선하신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굳이 이러한 하나님의 협의하지 않으심에 반기를 든 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인격적인 삼위 하나님께서 협의하셨음을 강하게 피력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로, 데살로니가 후서 2장 13절이다. 이 말씀에서는 세 개의 요점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택자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받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언급한다는 점이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한 진술을 하고 있다. 이 말씀은 선택을 단지 외적인 특권이나 서열에 관련짓는 모든 사람들의 궤변과 모호함을 단칼에 날려버리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구원, 그 자체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선택은 적절한 수단의 사용을 무시하지 않음을 확인해 준다는 점이다. 즉,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는 믿든지 말든지 막무가내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를 않다. 목적을 예정하신 그 하나님이 수단도 정해 놓으셨다.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신 그 하나님이 성령의 사역과 진리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이 실현되도록 작정하셨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는 ㅍ바로 그 사실이 열정적으로 찬양할 심오한 명분이라는 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점을 강력하게 표현 하고 있다.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한다’ 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다’ 는 것이다.

진정한 성도들은 이 예정에 관한 진리가 말씀 속에서 펼쳐지는 것을 볼 때에 공포로 움츠러들어 예정 교리로부터 뒷걸음 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놀라우신 은혜만을 바라보고 최상의 감사를 드릴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로, 디모데 후서 1장 9절이다.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용어는 참으로 적절하고 분명하다. 인간이 성경에 진술된 그 이상으로 명백하게, 혹은 더욱 강력하게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은 오히려 자신의 말에 의하여 어리석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행위에 다른 것이 아니다. 즉, 우리 안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 때문이 결코 아니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에 대한 보상도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목적과 은혜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놀라우신 은혜를 세상이 시작하기도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 안에서 이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이 은혜를 주신 시기는 우리가 빛을 보기 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담이 타락하기도 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의 아득이 먼 태초보다도 훨씬 전이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결코 빼앗길수 없는 위로가 잇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영원 전부터 온 것이라면, 그 선택하심은 영원에 이르기까지 지속될 것이다.

“영원으로부터 온 것만이 영원에 이를 때까지 지속될 수 있다. 그렇게 온 것이 그렇게 될 것이다” 라고 비숍(G.S. Bishop-천주교, 그리스 정교, 영국교의 주교, 기독교의 감독)은 말하였다.

여덟째로, 베드로 전서 1장 2절이다. 이 말씀에서 거듭 나타나는 교훈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구원 받는 자들 안에서 성령이 활동하시는 것과 이들이 믿음의 순종을 하는 것보다도 선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을 피조물의 영역에서 완전히 빼내어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즐거움 안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택이란 피조물의 영역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영역이며 피조물들에게서는 하나님으로 부터 선택받을 만한 그 어떠한 근거도 찾아볼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 이라는 표현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성도들은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어떤 자들이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믿음을 가지게 되어 이 어떤 자들이 영생에 이르게 될는지를 미리 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 속에서 미리 보시는 것은 죄를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증오이다.

사도행전 2장 23절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이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작정에 근거한 것이다. 이 말씀에 나타난 순서에 주목해 보면 하나님이 정하신 뜻(하나님의 작정)이 첫째이고,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 그 다음이다. 로마서 8장 28절로 29절에서도 이 순서가 다시 나온다. 29절 상반부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 말씀을 정확히 표현하면 ‘왜냐하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여 자기 아들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하셨다.’ 이다. 여기에서 첫 단어인 ‘왜냐하면’ 은 바로 앞 구절인 28절로 되돌아가도록 만드는데, 28절의 마지막 부분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이 있다. 바로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아신다’ 는 말이 성경에 나올 때 이 말은 승인과 사랑으로 아신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고린도 전서 8장 3절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된 자‘인 것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은 아시는 것이다. 본 구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 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승인과 사랑을 받는 특별한 대상으로 선택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여덟 구절들이 가르치는 교훈들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영생에 이르도록 정하셨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그 결과로써 그들은 적절한 때가 되면 믿게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은 택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구원은 보편적인 구원이 아니라 제한적인 구원인 것이다.

하나님이 택자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신 것은 그들 안에 있는 어떤 선한 것 때문도 아니고, 그들로부터 나오는 공로적인 것 때문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 것이다.

그 어떤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자들을 선택하여 자신의 특별한 사랑을 그들에게 부어주셨다. 하나님이 태초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장차 그러한 존재로 만드시기 위하여 선택하셨다.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셨을 때 자신의 영원한 계획을 실현할 수단도 작정하셨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한 바로 그 은혜를 하나님은 세상이 시작하기도 전에 자신의 목적에 따라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실제로 세상이 창조되기 오래전에 이미 하나님의 생각 속에 현존하였고,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명확한 대상이었다.

구원으로 예정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가 빈번하게 공격을 받게 된다. 이 진리를 왜곡하려는 자들은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구원을 베풀도록 만드는 어떤 원인을 하나님의 의지 밖에서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즉, 그들은 찾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만하도록 자격을 부여해 주는 그 무엇인가가 피조물에게 있다라고 본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택하신 자들을 선택하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선택의 이유가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한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때문도 아닐 것이며, 그들이 소유한 어떤 미덕도 아닐 것이며, 그들이 선량하였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마태복음 19장 17절의 말씀처럼 ‘선한 이는 오직 한 분(하나님)’ 이신 것이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기 때문도 결코 아닐 것이다. 로마서 3장 1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찾는자가 없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어떤 선한 행위를 행해서도 결코 아닐 것이다. 로마서 3장 12절의 말씀처럼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믿을 것을 하나님이 미리 보셨기 때문도 결코 아닐 것이다. 불법과 죄 가운데 죽어있는 자들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도행전 18장 27절의 말씀처럼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것’ 이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 선물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선물이란 받는 자에게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자에게 권리가 있는 것이다. 받고 싶다고 해서 받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주는 자가 주고자 하는 자들만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선물을 받을 자격은 받는 자들의 노력여하에 의해 절대로 결정되지 아니하고 받는자의 목적과 뜻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이 택하시는 대상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만 있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시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에 자신 예정하신 자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이러한 절대 고유한 영역을 어느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사상도, 철학도 그 어떤 것도 침범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 시대는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택하심이라는 날카로운 모서리가 자꾸만 무디어져 가고만 있다. 이럴 때 일수록 더욱더 성령의 검인 말씀의 날(엡 6:17)을 곤두 세워야만 할 것이다.

 

5. 로마 카톨릭의 구원관

 

로마카톨릭의 구원관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수가 있는데 이 세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완강하게 거부하며, 부정한다.

특히 그들이 주장하는 성찬설은 화제설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속죄의 피를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신부나 사제가 떡과 포도주에 축사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속죄하는 피와 살이 된다는 것이다.

구원관의 첫째는, 믿음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속죄제물로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부정하는 것보다 더 악랄한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은 믿음으로 시작한 구원이 선행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의 구원의 완성은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이다.

구원관의 둘째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호하게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한다. 그들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고 성직자의 권위에 의뢰하는 것이다. 이 세례를 가리켜 영세 라고 하며, 성세성사라고도 한다. 아울러 그들은 7성사를 중요하게 여기며, 이 7성사를 구원받기에 절대 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이를 통해 구원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외시 한다.

그들은 이 칠성사(七聖事)는 예수 그리스도가 정한 일곱가지 성사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수가 없다. 이 칠성사는 성세(聖洗), 견진(堅振), 고백 (告白), 성체(聖體), 병자(病者), 신품(神品), 혼인(婚姻)이다.

첫째로, 성세는 성세성사로서, 물로 씻는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세례를 의미한다. 이 성사를 받는 사람은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고 그 죄벌까지 온전히 면함을 받으며 천주의 자녀가 되고, 천주교회의 지체가 되고, 다른 성사를 받을 자격을 받는다.

둘째로, 견진은 견진성사로서, 영세를 받은 자에게 주교가 성신의 은총을 주기 위하여 그 신자의 이마에 성유를 바르는 성사이다. 이 성사를 받은 사람은 예수의 군사가 되어 말과 행실로 신앙을 증거하게 된다. 이 성사는 주교가 거행하며, 사제가 거행할 때에는 주교가 축성한 성유를 쓴다.

셋째로, 고백은 고백성사로서, 세례 신자가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여 용서 받는 일을 가리키며,‘고해성사’를 고친 말이다. 이 성사로 죄가 사하여지는 것은 통회하는 신자의 죄 고백을 들은 사제가 사죄경을 선언하면서 십자를 그어 죄사함을 베풀어 줌으로 된다.

넷째로, 성체는 성체성사로서, 성체를 배령하는 성사이며, 이는 거룩한 몸을 공손한 마음으로 삼가 받음을 의미한다. 이 성사에서 말하는 성체는 빵과 포도주로 계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이다. 이 성사는 칠성사 중에서 제일 큰 성사로서 천주교회의 제사이고, 또한 영혼의 양식이다.

다섯째로, 병자는 병자성사로서, 병이 들거나 늙어서 죽을 위험이 있는 신자를 천주에게 맡겨 구원을 비는 성사이며, '종부성사’를 고친 말이다. 이 성사는 특히 임종의 위험이 있는 신자들을 영신적으로 돕는 성사이다.

여섯째로, 신품은 신품성사로서, 신부가 될 부제가 주교로부터 받는 성사이며, ‘성품성사’라고도 한다.

일곱째로, 혼인은 혼인성사로서, 교회법이 허용하는 일남일녀가 혼인을 하는 행사를 이르는 말이다. 이 칠성사 중에서 죄인이 받는 성사는 성세와 고백, 두가지이며, 의인이 받는 성사는 그 나머지인 다섯가지이다. 즉, 견진, 성체, 병자, 신품, 혼인이다. 이 칠성사 중에서 일생에 한 번만 받는 성사는 성세와 견진과 신품이다. 이 세가지의 성사를 다시 받지 못하는 것은 영혼에 없어지지 아니하는 인호를 박아주기 때문이다.

구원관의 셋째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착하게 살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택함 받은 사람만이 믿을 수가 있는 것이므로 모든 사람의 구원은 성경을 왜곡하는 비진리이다. 결국에 이들은 구원의 관점을 죄인인 인간에게 두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성을 철저히 부인하는 인본주의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참고로 2004년 4월에 상영된 "THE PASSION OF CHRIST"(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 영화는 제목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중점적으로 다룬 영화이다. 하지만 그 수난 자체를 로마카톨릭의 관점을 묘사하여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희석시키고 속죄에 대해서 잘못된 시각으로 보게 하였다.

이 영화는 멜 깁슨이 감독, 각본, 제작하였으며, 짐 카비젤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맡았으며, 마이아 모겐스턴이 성모 마리아의 역할을 맡았으며, 모니카 벨루치가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의 제목은『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로써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수난' 이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죄인들에게 있어서 꼭 필요하고도 소중하며, 없어서는 안될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믿고 구원 얻을 사람들은 모두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칼빈의 5대 교리 가운데 하나인 제한 속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룬 영화는 자칫 잘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는데 그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구원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들이나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처절한 수난이 그의 죄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는 잘못된 시각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완성하여 주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어떤 영상물을 봄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상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믿는데 있어서 장애물이 될 위험성이 다분한 것이다. 왜냐하면 영상물이라는 자체가 어떤 사실적인 근거를 토대로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그 독특한 성향 때문에 전체의 내용 중에서 추가하거나 삭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분의 전 생애를 다룬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가는 수난 과정만을 그린 작품이므로 지극히 주관적이며, 폐쇄적인 것이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가장 중요하고도 중점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영화라는 것은 모든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것이기에 정확한 내용을 바로 시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모든 부분을 다 삭제해 버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의 장면만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큰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영상으로 보게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돈독히 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을 한다면 이 영화는 믿는 사람들만 보게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에게 이 영화가 공개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고 비록 저들은 육신적인 감정으로 감동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밝히 보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거룩한 분노(?)를 느꼈는데 이 분노는 영화상에서 예수 그리스를 처절하게 학대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느낀 것이 아니라 이 영화를 만든 사람과 이 영화가 방영되고 있다는데 대해서 금할 길이 없는 분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은 어떤 시대의 유행이나 양식에 따라 영상물을 통해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영상물을 통해 느끼는 감정은 그 순간뿐이고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그 영상물을 통해서 신앙인들의 믿음이 더 낙후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감정이 결코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킬 수 없음을 강하게 피력하는 바이다. 유행의 뜻을 가지고 있는 영어 단어는 "Fashion" (패션)인데 이 패션은 수난의 뜻을 가지고 있는 "PASSION" (패션)과 똑같은 발음이며, 다만 앞의 철자인 'F'와 'P' 만 다를 뿐이다. 이것을 필자 나름대로 해석해 보면 그리스도의 수난인 "PASSION"(패션)이 지금은 유행인"Fashion"(패션)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그 고귀한 수난이 유행이 되어 영상물을 통해 너무나도 쉽게 방영되어 버리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쉽게 매도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가치가 전락되어 희석되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뉴 에이지(New Age)의 특성 중에 하나인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영상화되면 그 자체가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훼파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성경적인 내용을 다루는 영화는 그 성경의 내용을 바로 인지하는 사람만이 제작해야 하는데 이 영화를 감독한 [멜 깁슨]은 진정으로 성경의 의미를 바로 아는 사람인가를 볼 때 결론은 그렇지가 못하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 문구를 보면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 인데 이 말에서 표명하고자 하는 사랑의 가치는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하지 못한 사랑인 것이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최대의 사랑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과는 다른 사랑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심한 매질과 비난과 혹독함을 받음을 구심점으로 하여 그 자체만을 사랑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기에 가장 중요한 구원의 사랑이 결부되어 버린 것이다.

이 영화는 김수환 추기경과 정진석 대주교라는 천주교의 거물급들(?)이 추천한 영화로써 기독교적인 영화가 아니다. 이 말은 이들의 주장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중에 등장하는 마리아가 성모 마리아라고 불리는 점과 아울러 마리아의 대사가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마리아의 대사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하기를 "우리 인간이 죄를 너무 많이 지었다. 많은 이들이 영적으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라고 말하는데 우리 인간은 결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다. 그 분의 고난은 구원의 방편이므로 혼자 당해야만 하는 것이지 결코 누가 동참할 수도 없을 뿐더러 동참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마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과하시고 외면하셨다. 이 영화의 내용을 분석할 때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영화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은 기독교적인 시각이 아닌 천주교적인 시각으로 비춰지는데 예수님이 아닌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전부 진 것처럼 강하게 묘사되어져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구원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것으로서 지극히 반 기독교적이며 성경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내용인 것이다. 또한 이 영화는 바티칸 교황청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시사한 것으로써 그는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영화는 성서에 있는 사실을 그대로 표현한 작품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언급을 통해 이 영화가 논란의 대상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고 하는데 과연 교황 바오로 2세가 성경의 의미를 아는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리고 그는 이 영화가 성경을 그대로 표현했다고 하는데 이 말이 바로 그가 성경의 의미를 모른다는 뚜렷한 증거인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는 교황과 추기경과 대주교가 추천한 것이기에 기독교 영화가 아니라 천주교 영화인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와 기독교는 성경을 보는 시각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서로 근접할수도 없으며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이 천주교의 잘못된 인본주의적인 신앙을 근거로 한 이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하며, 강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의 예수그리스도는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천주교적인 시각으로 묘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잘못 소개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 영화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가는데 심한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들리는 소문(?)에 이 영화를 많은 기독교인들이 보았으며, 많은 목사들이 이 영화에 대해서 좋은 평을 했다고 한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거룩한 분노를 느끼는 바이다. 이 영화는 성경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혼잡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125분에 걸쳐서 방영된 영화인데 첫 화면상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의미하고 있는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이 나오면서 B.C 700년이라는 이사야서가 기록된 연대가 나온다. 이 연대는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서로 엇갈리는 것이므로 영화상에서 연대가 기록된다는 것은 오해의 소지를 불러 일으킬 수가 있다. 그러기에 이러한 연대 표시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인 B.C 739년부터 그가 므낫세 왕에게 죽은 B.C 680년까지 활동한 선지자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인데 이 연대에서 알 수 있듯이 B.C 700년에 이사야서가 기록되었다는 것은 이 연대에 포함은 되었지만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은 그리 길지도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정확하고도 포괄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말씀인데 이 영화에서는 이 말씀을 모두 다 소개하지 않고 앞부분과 뒷부분인 두 단락만을 소개하고 있다. 이 구절은 네 단락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를 소개하지 않고 두 단락만을 소개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가감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이는 잘못된 처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설령 구절이 길다고 할지라도 모두 다 소개하는 것이 바른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의 내용 또한 예수님의 일대기를 모조리 삭제해 버리고 수난 장면만을 묘사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대기를 모르는 사람들에 있어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비추어지기 쉽상이다. 그러면 이 영화의 내용을 성경에 입각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이 영화에서 가장 처음 장면으로 겟세마네 동산이 나오고, 그 동산에서 예수님이 서서 한 쪽 손으로 나무를 잡고 기도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기도한다고 하기보다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두려워서 흐느끼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비록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두려워 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장면을 너무도 강하게 묘사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또한 이 사건 전의 일을 전혀 다루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영화란 장편 드라마가 아니기에 그 제한 된 시간내에 모든 것을 시사해야 하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신약의 전체의 내용 뿐만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계시록 까지의 성경 전체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특성상 그 모든 것을 다 방영할 수는 없는 것이며, 또 그렇지 못한다고 할지라고 영화상의 내용과 연결되는 꼭 필요한 부분만은 방영해야 하는 것인데 이 영화는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연코 성경을 영화화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특정 구조상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할수 없다는 것이 필자가 강하게 피력하는 바이다. 

두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걸어가시고, 제자들은 힘겨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모두 부를까요?' 라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다' 라고 대답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의 처절하고 나약한 모습이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되며, 또 다시 예수님께서 심하게 흐느끼신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인성적인 모습이 너무나도 강하게 보여지고 있어서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영화는 기독교적인 색채가 아닌 천주교적인 색채를 띄고 있기에 예수님의 인성적인 모습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이 모두 다 예수님의 신성적인 모습이 아니라 인성적인 모습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시어 오신 하나님으로 바라보며,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닌 성모 마리아가 낳은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마리아를 성모 마리아라고 하기에 이 영화는 기독교적인 영화가 아닌 천주교적인 영화인 것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신앙에 혼선을 가져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온다.그 내용은 "제발 절 지켜 주소서, 그들의 덫으로부터 구해 주소서, 한 인간의 힘으로 어찌 죄의 짐을 감당할 수 있으리요" 이다. 그리고 이어서 사탄의 유혹의 음성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아무도 그 무거운 짐을 질 수는 없어, 영혼 구원의 대가는 너무도 커 아무도.... 절대로.... " 이다. 그리고 계속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마다 사탄의 음성이 연이어 나오는데 그 내용은 " 네 아버지가 누구인가? 넌 누구인가? 이다. 이것 또한 예수님의 인성을 지나치게 나타내고 있는데 제발 지켜 달라는 내용은 성경에도 없는 내용이며, 굳이 이 내용을 성경에서 찾는다면 마태복음 26장 39절에 기록되어 있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다. 그러나 지켜 달라는 말과 이 말은 서로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다. 지켜달라는 것은 누군가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인간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실수 있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는 합당하지 않는 말인 것이다. 또한 이어서 '그들의 덫으로부터 구해주소서' 라는 말, 또한 성경에도 없는 지극히 잘못된 것으로써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말로써 이 말을 반증한다면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덫에 걸리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억지로 진 것인양 잘못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사탄이 '아무도 그 무거운 짐을 질수는 없다' 라고 하면서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발언을 하는데  이것 또한 성경에 없는 내용인 것이다. 비록 성경에 예수님이 40일 금식 이후에 사탄이 유혹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탄이 유혹했다는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지 않다. 이렇듯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지 않는 부분을 이 영화에서는 삽입하므로서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예수님을 사탄의 유혹을 받는 나약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예수님께 '네 아버지가 누구이며, 넌 누구인가?' 라고 물으면서 예수님이 마치 무지한 사람인 것인양 표현하고 있다.

네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에 지쳐서 쓰러지는 차원이 아니라 완전히 등을 하늘로 한 채 누워 버리셨고, 뱀이 등장하여 쓰러져 있는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의 손등을 넘어 얼굴로 가려는 순간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뱀의 머리를 발로 밟는 장면이 나온다.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처럼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 내용이 삽입된 부분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과 순서가 바뀐 내용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칫 잘못하면 성경의 오류성을 인정하게 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을 판 유다가 군병들을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오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고 물으시자 군병들이 '나사렛 예수다' 라고 하자 유다가 도망가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군병들에게 다시 끌려 온 유다는 예수님께 입맞춤을 하게 된다. 이 장면은 성경에 없는 내용으로써 성경에서는 유다가 도망가지 않고 바로 예수님께 입맞춤을 하였다. 이처럼 유다의 도망을 통해서 유다의 뉘우침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유다의 죄악상을 가리우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보다 앞서 방영되었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에서도 유다가 방황하는 예수님을 책망하고 정의의 바른 길로 인도하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 방영된 적이 있었다. 

여섯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로마 군병들과 제자들이 심하게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비록 성경에서도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칼로 자르기는 했지만 이 영화에서 비추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심한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을 묵상해 보면 이러한 난투극을 전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난투극을 벌인 것처럼 기독교인들에게도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비폭력주의이며, 그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일곱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박을 당하시고 심한 채찍질을 당하신다.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님을 넘겨주자 군병들이 예수님을 끌고 간 곳은 마가복음 15장 16절에 기록되어져 있는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채찍질을 당하신 것이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채찍질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아직 법적으로 죄인임이 표명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폭력은 합법적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박당하실 때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뺨을 심하게 아주 모욕적으로 때리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것은 너무나도 지나친 표현이며, 예수님을 모독하는 표현인 것이다. 이제 계속적으로  이 영화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의 고난 당하심을 살펴볼 것인데 그 내용은 예수님을 진정한 고난의 의미를 바로 전달하는 것이기보다는 모욕스럽게 표현하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여덟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 마리아가 잠에서 깨어나 '오늘밤은 다른 밤과 다르다' 고 하는데 이 내용은 기독교가 아닌 천주교적인 내용인 것이다. 비록 여성적인 예민한 감정과 어머니로서의 느끼는 바가 있겠지만 이것은 천주교에서 말하는 성모 마리아설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홉 번째로, 이 영화에서 결박당하신 예수님이 끌려가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 장면은 짐승이 끌려가는 장면보다도 더 심하게 비춰지고 있다. 그리고 잡혀가면서 이유도 없이 모질게 매를 맞으며, 주먹으로 심하게 구타를 당하신다.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아직 법이 집행되지 않았기에 인권유린에 해당하는 것이다. 주먹으로 구타를 당하신 예수님은 그 주먹의 강도가 얼마나 강했던지 다리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머리가 땅에 닿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긴 쇠사슬에 매어 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떨어진 예수님은 그 곳에 숨어 있던 자신을 판 유다의 얼굴을 보게 되며 그러자 유다는 두려워하게 되고 난데없이 원숭이가 나타나 고성을 지르고 사라진다. 그리고 다리 아래로 떨어진 예수님은 군병들에 의해서 끌어 올려진다. 이러한 내용 또한 성경에 전혀 있지 않는 내용을 묘사한 것으로써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자들에게는 심한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또한 원숭이는 길거리에 흔하지 않는 동물로써 그러한 원숭이를 등장시킴으로써 묘한 매료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열 번째로, 이 영화에서 끌려온 예수님을 가리켜 '이 거지를 왜 끌고 왔냐?' 고 묻자 '나사렛의 말썽꾼 예수다." 고 대답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이 대사 가운데 예수님을 수식하는 단어가 '거지'와 '말썽꾼'으로 나온다. 말썽꾼이라는 말은 그런데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거지라는 말은 예수님을 향한 지나친 모독이며, 굳이 이러한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심한 어투인 것이다. 이 거지라는 말이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전하는데 필요한 말인가를 생각해 볼 때 결코 그렇지가 않다. 이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 말고 그 어떤 이유도 필요치 않는 것이다.

열 한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을 판 유다를 어린이들이 조롱하는 장면과 그 뒤에 사탄이 서 있는 모습이 묘사되는데 유다가 너무나도 괴로운 나머지 목을 메게 된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죽어 있는 낙타가 보이며, 그 낙타 주위로 몰려드는 날 파리 떼가 보이는데 마치 유다가 이것을 보고 죽음을 결심한 것으로 묘사되어 지고 있다. 이것 또한 성경에 없는 내용을 자의적으로 추가시킨 것이다. 이처럼 사탄이 영화를 통해서 성경을 왜곡시키는 것이기에 더더욱 성경의 내용을 영화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다. 

열 두 번째로, 이 영화에서 마리아가 땅에 입맞춤을 하고 그 땅 아래에는 예수님이 천장에 두 손이 묶여 있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성경상으로 보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혀가신 후에 한 시도 쉴 틈도 없이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열 세 번째로, 이 영화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그 때의 예수님의 한쪽 눈은 너무나도 많이 맞아서 감겨져 있는 상태이고, 예수님이 하늘을 바라보시는데 날아가는 새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심하게 눈을 맞으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처절한 육신의 상태를 이 영화에서는 자극적으로 묘사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고난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열 네 번째로, 이 영화에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 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스스로 묻고 싶어서 묻는 것이냐? 아니면 저들이 그렇게 하니까 묻는 것이냐?' 라고 하시며 '넘겨준 자의 죄가 크다' 라는 대사가 묘사되는데 이 대사는 빌라도의 죄를 묵인하는 비 성경적인 내용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을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아닌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시는 것이다. 또한 '저들 손에 넘겨 죽게 해선 안돼!' 라는 빌라도의 독백이 나오는데 이 독백이 빌라도의 죄가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넘겨준 것이다. 

열 다섯 번째로, 이 영화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넘겨주자 끌려가신 예수님은 허리 높이에 설치되어 있는 수갑으로 두 손이 묶이신 채 군병들에게 조롱을 당하신다. 그리고 그 장소에 여러 가지 종류의 채찍이 있는데 군병들이 채찍을 고르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준비됐나이다. 아버지' 라고 하시며, 사탄이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지나간다. 이제 예수님은 심하게 채찍질을 당하시는데 당하실 때마다 살에 채찍의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지게 되고, 피가 흘러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다. 이 장면을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뜻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때리는 강도가 얼마나 강하던지 그 때리는 자들이 숨을 헐떡거릴 정도이다. 또한 끝에 갈고리가 달린 것으로 채찍을 바꾸게 되는데 시범적으로 나무 책상을 때리자 쉽게 갈고리가 책상에 박히게 되고 그 박힌 채찍을 잡아떼자 나무가 뜯겨져 나오게 된다. 그런 무시무시한 채찍으로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몸을 때리자 순식간에 갈고리가 예수님의 살에 박히게 되고, 그 박힌 채찍을 강하게 떼자 살점이 떨어져 나오게 된다. 바로 이러한 장면이 그대로 묘사되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정말로 끔찍함을 느끼는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무참한 채찍질로 예수님의 몸을 가격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이 채찍질로 하여금 예수님의 등은 갈기갈기 찢어져 골이 패이게 되자 그것도 모자라 예수님을 앞으로 돌려서 앞가슴을 채찍으로 때려 온 몸에 채찍 자국과  그로 인한 피로 얼룩지게 하였다. 이 장면을 보고 예수님의 고난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보다는 역겨울 뿐이었다. 

열 여섯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는 것을 지켜 본 마리아는 '내 아들아 언제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느냐?' 고 절규한다. 그리고 빌라도의 아내가 등장하여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세마포를 준다. 이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지 않은 내용이다. 채찍에 맞아 쓰러져 있는 예수님을 군병들이 양팔을 잡고 끌고 나가자 그 자리에 피가 줄을 그리게 되고 그 현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로 얼룩져 있다. 그리고 마리아가 빌라도의 아내로부터 받은 세마포로 그 현장의 바닥에 있는 피를 닦아 낸다. 이 장면을 통해서 다시금 예수님이 흘렸던 피의 양을 추측하게 하는데 예수님은 너무나도 피를 많이 흘려서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피를 흘리셔야 할 곳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열 일곱 번째로, 이 영화에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께 가시면류관을 씌우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가시관을 예수님의 머리 위에 씌우고 양쪽에서 두 사람이 막대기로 가시관을 눌러 머리에서 피가 나게 하는 장면이다.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써 너무나도 지나치게 예수님의 고난을 표현하여 학대의 관점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가시관이 씌어져 있는 예수님의 머리를 때린다.  

열 여덟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과 두명의 강도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두 강도는 십자가의 가로에 해당하는 횡목을 지고 가는 반면에 예수님은 십자가 모양의 나무를 지고 간다. 그러나 원래는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의 세로에 해당하는 나무가 서 있기 때문에 가로의 부분만을 지고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강도가 지고 간 십자가의 가로 부분은 맞는 것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맞지가 않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죄가 상대적으로 더 커 보이게 하는 잘못된 방법이다. 그리고 골고다 상에서 두 강도의 십자가는 'T' 자인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 자로 묘사되어져 있다. 십자가는 죄인을 매달아 죽이는 형벌 기구로써 고대 시대에는 하나의 긴 기둥을 사용했다가 점차 'T' 자형(Crux Commisa), '†' 자형(Crux Immissa), 'X' 자형(Crux Decussata)으로 발전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세가지의 형태 중에 '†' 자형이 사용되었으며, 예수님 이후에 사도들 시대에는 'X' 자형이 사용된 것이다. 그러기에 두 강도도 'T' 자형 십자가가 아닌 '†' 자형 십자가가 맞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어떤 장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열 아홉 번째로, 이 영화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는 예수님을 마리아가 일으키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것은 성경에 없는 내용이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일으키는 마리아에게 '보소서 어머니, 제가 모든 걸 새롭게 하나이다.' 라고 하는데 이 장면을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성모 마리아설을 긍정하게 한다. 또한 성경에도 없는 내용을 삽입하므로써 마리아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스무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을 갈릴리인으로 소개하는데 예수님은 갈릴리가 아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며, 헤롯을 피해 나사렛에서 사신 분이시다. 그리고 다만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역을 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름 앞에 자신이 사는 마을의 이름을 붙이는데 예수님은 갈릴리 예수가 아닌 나사렛 예수인 것이다.

스물 한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더 이상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자 로마 군병들이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라고 말하자 시몬은 싫다고 거부하게 되고, 또 다시 지라고 하자 '좋소, 허나 나는 죄 없이 십자가를 지는 거요.' 라고 말한다. 이 시몬의 대사를 상대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죄가 아닌 죄인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시몬은 그 당시에는 십자가를 질 만한 죄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죄인인 것이다.

스물 두 번째로, 이 영화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군병들이 채찍으로 때리자 그 충격으로 예수님은 튕겨져 나가 땅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죄수가 잘 지고 가지 못할 때에 채찍으로 때리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상태에서 때리는 것이며, 필요 없는 채찍질로 하여금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예수님을 너무나도 지나치게 채찍으로 때리자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놓고 그만 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람을 때리면 한 발자국도 안 가겠소' 라고 한다. 이러한 장면은 성경에 없는 것으로써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상상하여 그려 낸 자작극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지쳐 있는 예수님께 시몬은 '다 왔으니 조금만 참아요, 이제 다 왔어요' 라고 부추긴다. 이처럼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을 너무나도 지나치게 묘사하여 마치 예수님이 아닌 시몬이 십자가를 진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스물 세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동안 그의 얼굴을 닦아주는 여인이 나오는데 이 여인의 이름은 베로니카이다. 이 베로니카라는 여인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여인이며, 카톨릭 전통에 나오는 여인으로서 이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피를 닦아 준 베일이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고, 이 베로니카는 그 베일로 로마 황제의 병을 낫게 해 주었다고 하며, 또한 그 후에는 클레멘트 교황과 다음 계승자들이 간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영화는 성경에 등장하지도 않는 베로니카라는 여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성경에서 벗어난 것임을 말하고 있으며, 천주교의 영화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스물 네 번째로, 이 영화에서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가 땅바닥에 펼쳐져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십자가의 세로에 해당하는 나무가 고정되어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손바닥에 큰못을 박는데, 그 못을 박는 큰 망치가 하늘 위로 높이 솟구치고 내리친다. 그 때마다 못의 손바닥을 파고 들어가 피를 흘리게 된다. 이제 한 쪽 팔을 못 박은 후에 다른 팔을 못박으려고 끌어당기자 그 팔이 끌어 당겨지지 않게 된다. 그러자 그 팔을 줄로 묶고 그 줄을 무참하게 잡아당긴다. 그러자 마치 팔이 찢어지는 것과 같이 당겨지게 되고 그 손에도 못을 박게 된다. 그러자 그 못이 손과 나무를 뚫고 나와 그 나무 밑바닥에 못을 끝이 보이게 된다. 그리고 발목의 버팀목을 십자가에 박고 그 위에 발을 올려놓아 발목에도 못을 박는 장면이 묘사된다. 이 장면이 너무나도 끔찍하여 지켜보던 마리아가 땅바닥에 있는 흙을 움켜쥔다. 이러한 끔찍하고 적나라한 고통의 장면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밝히 보지 못하게 하게 오히려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스물 다섯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십자가를 뒤집는데 십자가의 가로의 한쪽 끝 부분과 세로의 아래 쪽 부분을 지렛대로 삼아 십자가를 뒤집는 것이다. 그리고 뒤집힐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전해지는 충격은 너무나도 큰 것이다. 또한 십자가를 뒤집을 때 그냥 놓아 버려서 바닥에 꽝하고 떨어지게 한다. 그 충격 또한 대단한 것으로써 이미 채찍에 맞아 찢기신 살에 가해지는 쓰라림은 정말로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뒤집힌 십자가에 손과 나무를 뚫고 나온 못의 끝부분을 망치고 휘어지게 하여 안 빠지게 고정시킨다. 그리고 난 후에 다시 십자가를 뒤집어 떨어뜨린다. 그리고 죄명이 기록된 패를 박고 미리 파 놓은 구멍에 그 십자가를 세우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형벌은 역사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써 이는 예수님의 고난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박은 채로 그 십자가를 두 번이나 뒤집고, 세우는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필요 없는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은 전혀 사실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장면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스물 여섯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눈을 까마귀가 날아와서 파 먹고 머리를 심하게 쪼게 되자 군병이 긴 막대기로 그 까마귀를 내쫓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러한 성경에도 없는 끔찍한 장면을 이 영화에서는 무분별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서인데 이 장면은 그러한 용서의 개념 까지도 무참히 짓밟아 버린 것이다.

스물 일곱 번째로, 이 영화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입맞춤을 하고 말하기를 "내 살에서 나온 아들아! 내 영에서 나온 영이여, 나도 함께 죽게 해 다오' 라고 한다. 이 대사는 성모 마리아설을 주장하는 것으로써 다시 한 번 이 영화가 기독교가 아닌 천주교의 영화임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기에 내 살에서 나온 아들이라는 표현을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 영에서 나온 영이라는 말은 전혀 합당치가 않은 것이며, 이는 성모 마리아설을 강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의 영이 마리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영이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입맞춤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인 것이다.

스물 여덟 번째로, 이 영화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묘사하는데 이는 예수님을 욕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도 처참한 것이다. 비록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이지만 믿는 신앙인들의 입장에서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그 추한 저주받은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십자가의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의혹을 품게 한다.

끝으로, 이 영화에서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요한이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리며 성경과는 달리 아리마대 요셉이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무덤 문이 열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오시는데 그의 손바닥은 구멍이 뚫려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손바닥이 아닌 손목에 못이 박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물들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으며 비록 성경의 내용을 영화화하였지만 성경을 기초로 하지 않고 감독의 자의적인 생각으로 만들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에 그 말씀은 그대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이 영상화되어 버리면 훼손될 우려성이 심히 큰 것이다. 필자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앞에 가는 부부의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아마도 부인이 불신자인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 같이 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남편이 한 말은 '무슨 영화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만 나오냐?' 이다. 이 한마디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며 필자도 공감하는 말이다. 비록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십자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다양성을 배제한 이 영화는 그릇된 오해를 갖게 하는 것이다. 시간 관계상 그랬다고 할지는 몰라도 이것은 핑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을 내용으로 하는 영상물들을 하나같이 성경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어느 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이다. 이단의 특색 또한 성경의 전체적인 의미를 보지 않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부분들을 골라서 마치 그것이 진리이며, 전부인 것인 양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통해 진리가 토막 나고, 희석되어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탄의 전략(戰略)을 깨달아 알고, 마귀의 궤계(詭計)를 능히 대적(對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胄)를 입어야 할 것이다(엡 6:11).

 

Ⅲ. 결 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도 같이 성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 방법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이미 구약시대때부터 짐승의 피 흘림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보여주시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짐승들의 결정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삼으시고 그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하지만 이 유일한 구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인간의 노력여부가 결코 필요치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을 통해서 받아들일수 있으며, 믿을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칼빈주의의 성경적인 구원설인 제한적 속죄의 의미가 더욱 더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빛을 발하고 있다. 만약에 구원이 모두에게 주어진다면 그 구원에 결코 인간들이 감사하지 않을 것이며, 구원의 중요성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자유주의에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찾아 볼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밝히 알아야만 진정한 감사와 찬송을 드릴수가 있으며, 자유와 안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칼빈주의를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과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of men))이다. 이 두 가지의 명제는 서로 상반된 의미이지만 뗄레야 뗄수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기에 결코 두려워할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게 된 근본적인 경위 또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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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글 이단종파연구 관리자 2010.01.04 2 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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